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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만나는 법] 앞길을 내다보며 암중모색 중인 ‘반골’… 손영현 국선전담변호사

법률신문 / 202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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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의 위상과 권익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사명감이라고 생각해요
의제가 무엇이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건
전문 분야에 있는 이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의 여부거든요
2000년대 학번으로 학부생일 때부터 불합리한 학내 문제서부터 정치사회적 현안까지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던 운동권 출신이라고 했다. 그 반골 같은 기질은 계속 이어져 변호사가 되어서도 민주당 P의원의 선임비서관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공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국선전담변호사로서 소신 있는 변론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다.
공동체 문제, ‘지금 여기’의 문제에 대한 관심과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그냥 무심하게 지나칠 만도 한 문제를 어떤 이는 집요하게 모순을 물고 늘어지며 수정이나 개선책을 모색한다. 손영현 변호사(42·변호사시험 6회)는 태어나기를 후자의 에너지를 갖고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 기원의 줄기를 알고 싶어 성장 환경부터 물었다.
“제가 면사무소 소재지인 시골, 그러니까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아버지는 동네 한의사였어요. 의료기관이 보건소 말고는 아버지 계시는 곳이 유일한 데서 자랐는데, 시골이다 보니 한의원이 늘 어르신들로 북적거렸고 아버지가 어린이날이나 졸업식을 챙겨주신 적이 없어요. 늘 자리를 지켜야 했으니까요. 동네에서 어떤 분이 돌아가시면 밤이고 새벽이고 아버지를 찾아오는 거예요. 응급차 타고 병원 가는 것도 힘든 외지였으니까요. 그렇게 헌신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저도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인터뷰이의 요청으로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그는 어머니와 모종의 비밀스러운, 고되고 애틋한 서사를 공유하는 성장기를 보냈다. 아버지에게서는 헌신하는 자세를, 어머니에게서는 넓고 자심한 사랑을 배운 그는 의학전문대학원 진학을 염두에 두고 일단 연세대 화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학업보다는 학생회 활동과 운동에 전념하다가 학사경고 누적으로 제적을 당한다. 단과대 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재학 중 여성주의와 장애인 인권 운동에 깊이 빠져들었고 이과대 건물 과학관에 아예 없던 여자화장실과 휠체어 경사로 설치를 학교 측에 요구하기도 했다. 또한 재학 당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서 조사를 받고 유치장 신세를 진 적도 있었는데, 이때 안양경찰서에서 만난 변호사에게서 각별한 인상을 받고 법조인의 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런데, 영특한 아들이 공부보다는 학생운동에 진력할 때, 속이 타셨을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저희 아버지가 한의사이다 보니 <동의보감>의 대의 중의 소의에 대한 이야길 많이 들었거든요. 소의는 몸을 낫게 하고, 중의는 마음의 병을 낫게 하고, 대의는 사회의 병을 낫게 한다고요. 그래서 제가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현장에서 뛰어다닐 때 딱히 뭐라고 말씀하시지는 않고 암묵적인 지지를 해주셨던 것 같아요. 물론 학업과 운동을 잘 병행했으면 좋았을 테지만요.”
그는 학점은행제를 활용해 학사를 취득하고 학사장교로 5년간 복무한 뒤 뒤늦게 법조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로스쿨에 진학한다. 그러곤 변호사시험(6회)을 통해 변호사 라이선스를 손에 쥐게 된다. 손 변호사는 현재 또래 법조인들 사이에서도 공익이나 권익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변호사로 알려져 있다. 필시 주관적인 정보가 개입된 결과일 수도 있지만,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언변과 인상은 상당히 강직해 보였고 특히 앙다물었을 때의 입술과 눈매에서는 이상주의자의 결기마저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법조인은 전문직 종사자를 넘어서 우리 사회가 고비용으로 키워낸 중요한 인적 자원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회적 영향력과 발언권을 가질 수도 있는데, 그처럼 다양한 선택지를 두고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하면서 공익적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인지였다. 사심 없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동력이 무언지 궁금했다.

“고민을 좀 해봤는데 첫 번째는 분노인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주변의 칭찬과 격려인 것 같고요. 분노는 당연히 어떤 불합리한 것들을 향한 것이죠. 저건 분명 틀린 것인데 왜 아무도 틀렸다고 얘기를 안 할까 하는 의구심이 분노로 이어지더라구요. 분노의 대상은 대개 법원이나 검사들인 경우가 많아요. 제가 국선 전담 업무를 하다 보면 피고인한테도 욕을 먹고 피해자한테도 욕을 먹거든요. 그때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아요. 그들은 법을 잘 모르고 변호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니까 당연히 욕할 수 있죠. 그런데 검사가 변호사에게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식으로 함부로 대하고 공격할 때는 분노가 일더라구요.”
그의 ‘분노론’은 법원에 대한 성토로 이어졌다. 그가 화제로 올린 것은 발달장애인법과 관련된 사례였다. 한 발달장애인이 절도죄로 경찰서에 들어왔는데, 발달장애를 호소하니까 수사관들이 등록증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던 발달장애인은 제때 답을 하지 못했는데 진술조력인의 도움마저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발달장애인에겐 법에 따른 보호가 필요한데 경찰은 보호 의무를 외면하고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손 변호사는 여기서 법원의 역할을 강조했다.
“제가 현장에서 느낀 건데 이런 문제에 대해 법원이 너무 무관심해요. 그런 법들이 있으니 수사기관이 안 지키면 법원에서 적극 권고하고 돌려보내야 하죠. 그런데 수사기관이 법이나 절차를 안 지키고 증거들을 만들어와도 다 받아주니까 더더욱 법을 존중하지 않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거예요. 국선 전담한 지 3년이 넘었는데 일을 해보니까 수사기관을 망치는 건 법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손 변호사는 특이하게도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일한 적이 있다. 그와 관련해 입법에 참여했던 소회를 물었다.
“제가 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3000명의 사람들이 여의도 1번지에 모여서 마치 자신들이 세상을 구할 거라면서 밤을 새우며 법을 만들고 있어요. 그렇게 법을 만들어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법의 효력을 무시하면서 터무니없는 판결 같은 걸 내리니까 좀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익, 인권, 권익 같은 단어에 본능적으로(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그에게 처음부터 들었던, 다소간 얄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남달라 보이는 사명감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민변 같은 데 가입하고 사선으로 일하면서 사회적 이슈를 맡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고 상대적으로 활동 폭이 제한적인 국선변호를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국선변호사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물었다.
“국선변호사를 하고 있는 이유는 돈이 없기 때문이에요. 와이프와도 이야길 나눈 것인데 여섯 살짜리 아이도 있고, 국선은 안정적으로 페이가 나오니까요. 그리고 국선변호사로서 딱히 냉소적인 시선에 대한 어려움은 못 느껴요. 처음에 별 기대를 안 하시던 분들도 본인이 생각하지 못한 문제점들을 제가 이야기하고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좀 다퉈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쟁점들을 정리하고 그분에 대한 기록을 성실하게 파헤쳤다는 걸 보여주면 불신이나 냉소는 금방 없어지더라구요. 사선 같은 경우엔 의뢰인이 페이를 내니까 그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해줘야 하는 부담이 있는데, 국선은 요구가 너무 과도하고 부당하다 싶으면 그것에 브레이크를 걸 수도 있어요. 오히려 합리적인 부분이 있죠.”
로스쿨 도입 이후 변호사 숫자가 대폭 증가하면서 근 10년 사이 변호사 시장의 환경도 많이 바뀌었고 직능의 사회적 역할 같은 것에도 변화 조짐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변호사의 위상과 권익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물었다.
“결국 사명감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의사들도 그렇지만 의제가 무엇이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건 전문 분야에 있는 이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의 여부거든요. 저는 의대 정원이 증가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 의사들의 저항이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그들이 간호사들 태움 당할 때 뭐 했고 다른 사회문제나 다른 직능 단체의 문제들에 대해서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어요. 사회적 사명감에 대해서 의사 단체가 후한 평가를 못 받으니까 지지를 못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에게 앞으로 공직이나 정치권에서 혹여 영입 제안 같은 게 오면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었다. 나는 공공을 향한 그의 에너지가, 그러니까 그의 몸속에 전자칩처럼 내장되어 그를 움직이고 실천하게 하는 그 공공성의 회로가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마주 앉은 국선전담변호사 사무실이 그에겐 너무나 비좁고 옹색해 보였기 때문이다.
“영입 제안 같은 게 오면 적극적으로 고민해 볼 생각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생각하는 정치적 신념과 일치하는 곳이라는 전제에서요. 저는 청년 정치가 중요하고 계속 인력이 충원되는 게 필요하다고 보는데, 제가 국회에서 일할 당시만 해도 국선 전담의 현실에 대해서는 잘 몰랐거든요. 이렇게 다양한 취약계층이 있는지도 몰랐고요. 이후 그런 경험들을 해보니까 어떤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예컨대 국회에서 법원행정처장님한테 발달장애인법 준수하고 있냐 이 질문 하나로 몇 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일에 돌파구가 생길 수도 있거든요. 그런 일들을 하면 좋겠지만 그 길로 가기 위해 지금 뭔가를 전략적으로 투자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다소간 듬직한 체구에 음전한 말투, 피로에 짓눌린 표정 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안광, 그리고 사방에 쌓인 서류철 사이에서 진지하게 자신의 앞길을 내다보는 그는 자본만능이라는 신화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암중모색 중인 젊은 맑스를 연상시켰다. 이것은 과장도 아니고 너스레도 아니다.
김도언 시인(소설가)